서영은
1943년 강원도 강릉 태생. 강릉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건국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서울시 수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68년 『사상계』 신인작품 모집에 단편 「교(橋)」가 입선되고, 이듬해 『월간문학』 신인작품 모집에 단편 「나와 ‘나’」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국문학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문학사상』의 편집장을 역임한 바 있다. 주요 작품집으로는 『사막을 건너는 법』(1975), 『살과 뼈의 축제』(1977), 『술래야 술래야』(1980), 『황금깃털』(1984), 『그녀의 여자』(2000) 등이 있으며, 단편 「먼 그대」로 제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서영은은 단편 중심의 창작활동을 한 과작의 작가이다.
사막을 건너는 법 줄거리
나는 침묵 속에서 나미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나미는 내가 월남에 갔다 온 뒤부터 딴 사람이 된 것 같고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인생을 포기한 듯한 태도에 대한 이유를 알기 전엔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미의 손에는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 끼워 준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때 우리는 똑같이 졸업을 이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우선 눈빛을 고치고 무언가를 해 보라고 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반지를 끼워주자 "다른 남자랑 말도 하지말고 보지도 말고 웃지도 말라는 약속으로 주는 거야" 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기다릴 수 있겠다고 했지만 내 말문은 더욱 막히고 말았다.
나미는 뛰쳐나갔고 나는 그녀가 같은 걸 요구해 와도 대답을 줄 수 없기에 따라나가려다 그만 두었다. 식구들이 나를 지겹게 여기고 있는 눈치가 보였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년이 가까워 오니까. 처음 제대증을 휴대하고 부산항에 닿을 때까지도 몰랐는데 서울에선 낯선 땅으로 뒷걸음 쳐가는 성싶었다. 나는 집에 도착한 순간 내 몸에 밴 전쟁 냄새, 긴박감이 모든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것 같았고 그것들에 대한 흥미도 없었다. 나는 내 안의 긴장, 진실에 대해 얘기 해보려고 했으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전 다방에서의 일이 이제 생각난다. 어쩌다 그런 얘기를 나미에게 들려주었을까?
D고지에서 전투중인 OO연대 근처까지 물을 실어다 주라는 명령을 받고 나와 한 병장은 밤중에 급수차를 몰아 T를 떠났어. 적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 한 병장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나는 적보다 무서운 건 무감각이라는 걸 깨달았어. 중간에 엔진이 고장나 몇 시간을 지체하니 동이 텄어. 전속력을 달려 목적지를 8km남겼을 때 우리는 적에게 발견되어 사격을 받았지. 내 맘속엔 내 생명보다 물을 기다리는 수천의 생명들에 대한 의지가 뭉쳐져 있었어. 차창이 박살나며 한 병장이 고꾸라졌고 나도 오른팔에 부상을 당했지. 차를 달려 아군의 보초막사가 보이는 순간 정신을 잃었어. 나는 당시의 긴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래서 훈장을 타게 됐느니 베트콩은 죽여 봤느니 하는 것이나 물었고 나는 불쾌해져 나와 버렸다. 이것이 그 날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지금 을지무공훈장을 바라보고 있다. 한낱 작은 그 쇠붙이 조각을. 나는 의자를 공터가 내다보이는 북쪽 창으로 끌어갔다. 웅덩이엔 늘 물이 고여 있고 쓰레기가 뒹굴고 있다. 한쪽 편엔 어설프게 펼쳐진 비치파라솔 밑에 지금은 비어 있지만 뽑기과자를 파는 노인이 있다. 물웅덩이 있는 곳에서 노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노인은 누렁개의 목줄을 끌고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무언가를 찾고 있다. 아이가 노인에게 뽑기를 해달라고 했고 돌아서는 노인의 얼굴엔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대수롭지도 않은 광경에 빠져 있는 내가 어처구니없었다. 한데 소년이 돌아가자 노인은 다시 그 장소로 되돌아갔고 나는 다시 노인의 모습을 쫓고 말았다. 노인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그 일 자체가 나의 무기력에 대한 도전같이 여겨졌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아틀리에로 내려가 성급하게 캔버스 앞에 앉았지만 꽉 막힌 기분이었다.
어느 사이 어두워져 나는 힘겹게 걸어가 스위치를 올리고 메마른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내 시선이 내가 대학 2학년 때 제작한 L교수의 흉상에 머물렀다. 나는 지금까지 그를 존경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그 흉상을 본 순간 거짓을 발견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의자를 들어 그것을 향해 내 던졌다. 아까부터 나는 창 옆에서 노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노인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나는 계속 도전을 받는 셈이기에 나의 생활은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을 좀더 명확히 판단하기 위해 그와 얘기라도 나눠봐야 할 것 같다. 드디어 노인이 나타나더니 물웅덩이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노인에게는 끈질긴 어떤 힘이 나오는 듯 하다.
나는 방에서 뛰쳐나왔다. 나는 뽑기를 주문했고 잠시 후 노인의 손에서 비행기무늬의 얇은 과자가 만들어져 나왔다. 나는 다섯 개를 더 주문했고 노인에게 뭘 잃어버렸는지 물었다. 그는 아들이 월남전에서 받은 훈장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아들 자랑을 늘어놓더니 앙케 고지 탈환작전에서 죽었다는 말을 할 때는 풀이 죽어 있었다.
훈장은 아들 생각이 날 때 보려고 지니고 다니다가 꼬마녀석이 보자기에 꺼내주었고 그 녀석이 물웅덩이에서 놀다가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훈장은 을지무공훈장, 내 방의 한낱 쇠붙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노인은 그것을 절대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을 희롱하는 기분으로 누구와 사는지 물으니 아홉 살짜리 손녀딸과 살며 개는 아들이 얻어와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값을 치르자 노인은 다시 웅덩이로 갔다.
노인은 벌써 내가 표적을 해둔 곳에서 그냥 지나치곤 한다. 나는 어제 내 훈장을 물웅덩이에 던져 버리고 표시를 해두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보잘것 없는 훈장을 노인에게 들이대며 노인의 그 끈질긴 힘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케 하고 싶었다. 노인의 눈 속에서 허무의 모습이 비치는 광경을 보아야 나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다섯 번째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공터에 당도했을 때 자전거에 간장단지를 매고 팔러 다니는 소년이 왔다. 나는 노인에게 도와드리겠다고 하고 웅덩이를 뒤척거리는 척하다가 표적 앞에 와 쇠붙이 조각을 끌어 올려 노인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나는 노인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쏘아봤다. 그때 소년이 끼어 들어 훈장을 집으려 하자 녀석의 손을 밀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척했다.
그러나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로 흉악하게 일그러져 돌아서더니 포장 쪽으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맥이 탁 풀렸다. 그 때 소년이 다시 훈장을 빼앗아가며 할아버지는 훈장이 아무 소용없으니 자기를 달라고 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아버지의 옆방에 산다는 그 소년을 통해 할아버지가 훈장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고 하시다가 웅덩이에 갖다 버렸다는 얘길 들었다. 그리고 소용없어 버렸으면 왜 찾느냐고 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할아버지는 혼자 살며 개 역시 병든 것을 주워 온 것이라고 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노인은 죄다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 그 밖의 모든 것을. 노인이 저만큼 떠나려는 것이 보인다. 몇날 며칠 불러모은 혼으로 집을 짓고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에 나타난 나를 증오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어딘가에선 다시 시작하겠지. 나는 정말 바보였다.
더 알아두기
초기 소설 속에서 서영은이 추구했던 문제는 일상적 자아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비속한 모습에 대한 환멸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경향을 집약하고 있는 소설이 단편 「사막을 건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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