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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극 수필 전문 줄거리 해설/2021 수능특강

송영 호신술 전문/해설

 

 

 

 

 

호신술 이해와 감상 및 해설 (송영)*

"호신술"은 부르주아인 공장주 사장 김상룡이 노동자들의 파업에 맞서기 위해, 체육교사인 윤선생을 통해 처와 노부에게까지 호신술을 배우게 하는 과정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을 풍자한 작품이다. 단막극.

 

이 작품은 호신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극적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고 지배계급인 자본가가 호신술을 배우는 모습을 통해 그 계급이 가지고 있는 위기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본가 계급의 기득권은 호신술로써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위기에 처한 자본가의 허약한 모습이 과장스럽게 나타나면서 송영의 풍자가 살아난다. 상룡으로 대변되는 부르주아의 노동자에 대한 시각과 그들의 소비적, 향락적 생활상을 통하여 가장 전형적인 타락한 부르주아의 사고가 담겨 있다. 의사와 변호사로 대표되는 상류층들을 등장시켜 그들 모두가 노동자들과는 이질적인 계급임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호신술은 작품을 풍자적, 해학적 구성으로 이르게 하는 매개 장치로써 기능하고 있다. 모든 사건의 전개는 호신술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호신술을 배우게 되는 동기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이 과정을 통해 부르주아 가족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한껏 그들을 조롱하고 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호신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부상을 당하고 처 경원은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결국 노동자들이 상룡의 집 앞까지 몰려오지만 그것을 대비해 배운 호신술은 전혀 써먹지 못하고 경찰의 힘에 의존한다. 작품의 거의 전 과정을 상룡이 호신술을 배우는 것에 할애한 작가가 결국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자 호신술이 전혀 필요가 없게 됨을 통해서, 호신술이 가족들의 신체적 부상만을 가져다주었다는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부르주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부분은 작품의 말미에서, 함성소리 등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점도 역시 송영의 주된 의도가 부르주아의 성격을 폭로함에 있음을 반증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기할 사항은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무대상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효과를 올리기 위해, 작가는 작품의 갈등구조를 약화시킨 대신 김상룡을 위시한 부정적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어 관객의 조롱거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극의 말미에 노동자들의 공격적인 함성을 삽입하여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마음껏 상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송영

본명은 무현(武鉉). 1903년 5월 24일 서울 태생. 배재고보를 중퇴한 후 1922년 무산문화운동 단체 염군사에 참여하였으며, 잡지 《염군》에 소설과 희곡을 실었지만 일본 경찰에 잡지 원고가 압수되어 발간되지 못했다. 1922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간 송영은 공장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현장 경험을 쌓게 되는데, 「정의와 칸바스」(1925), 「아편쟁이」(1930)에는 이러한 체험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귀국 후인 1925년 7월 《개벽》 현상문예에 송동량(宋東兩)이란 이름으로 응모한 「늘어가는 무리」가 3등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되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참여하였으며, 계급갈등을 뛰어난 극작술로 극화해 내었으며, 프로희곡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초기작인 「정의와 칸바스」, 「아편쟁이」 등은 촌극이거나 촌극에 가까운 단막극 형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계급의식을 고취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등장인물을 통해 직접 말해지고 있다. 프로연극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의 작품인 「일체 면회를 사절하라」(1931), 「호신술」(1931), 「신임이사장」(1934) 등은 대부분 무대공연을 크게 의식하고 제작한 작품으로서 부정적 인물이 자신의 결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방식의 풍자극으로 일관하였다.

1935년 카프 해산 이후 상업극단에 가담하여 작품 활동을 한 시기이며, 「황금산」(1936)이나 「윤씨일가」(1939)를 제외하고는 세태 풍자와 비판을 중시하고 있지만 그 이전의 날카로운 풍자성이 상실되면서 단순한 소극(笑劇)으로 떨어진 작품이 많다 하겠다. 그는 대중극의 대표적 극단인 <청춘좌>와 <호화선>에서 극작가의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약 50편 이상의 공연 작품 목록이 확인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송영은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에 잠시 관여하였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이해와 감상 및 해설은 논문 "송영 희곡 연구/공태수"를 참고 했음을 밝힙니다.

 

 

 

 

***전문은 아래 pdf에 있습니다!***

****pdf 암호는 ""marstyob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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