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bs 소설 전문 줄거리 해설/2021 수능특강

서유영 육미당기 줄거리/해설

 

 

 

 

 

육미당기(서유영) 줄거리

신라 태자 김소선()은 부왕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남해 보타산에 간다. 소선은 죽순을 가지고 오다가 이복형 세징()의 습격으로 죽순을 빼앗기고 실명하여 섬에 혼자 남게 된다. 그때 유구왕 백문현()이 중국으로 가던 길에 소선을 구출하여 당나라에 데려가고, 딸 백소저와 약혼시킨다.

 

백문현이 간신의 참소로 유배를 가고, 소선은 집을 나와 방황한다. 소선은 퉁소 솜씨 덕택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고 옥성공주와 가까이 지내게 된다. 소선이 옥성공주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을 때 고국(이 작품에선 신라)에서 기르던 기러기가 모후()의 편지를 전하게 되자, 소선은 기뻐 눈을 뜨게 되었고 그의 신분이 밝혀져 한림학사를 제수받고 옥성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한편, 백소저는 남장을 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된다.

그때 토번()이 침범하자 소선이 초유사를 자원하여 적지에 갔다가 감금되었는데, 백소저가 원수로 출정하여 토번을 격파하고 소선을 구출해왔다. 백소저가 개선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임금은 그를 금성공주로 책봉하여 소선의 둘째 부인이 되게 한다.

 

소선이 부인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오자 세징의 죄악이 탄로나고 부왕이 극형에 처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선의 간청으로 세징의 형벌이 감해지고 세징은 착한 사람이 된다. 소선은 환국하여 금성공주와 함께 왜국의 침범을 물리치고 왜국의 서울인 강호까지 가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소선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푼 뒤, 부인들과 함께 보타산에 가서 승천한다.

 

 

 

 

이해와 감상 및 해설

"육미당기"는 불경 소재 「선우태자전()」과 그것을 소설화한 「적성의전()」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발전시킨 작품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현실에서 벗어나 갈등 없는 이상세계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서유영은 한직()에서 적막한 것을 달래기 위하여 이웃에서 책을 빌어 보고 그 중에서 지루하고 너저분한 것은 버리고, 세상의 인심과 물정을 묘사한 감동을 주는 부분을 허구적으로 창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작품은 민족의식이 내재하여 있는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소설의 배경이 완전히 중국인 것이 대부분인 데 비하여 이 작품에서는 소선이 신라 태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공명을 세워 부마가 되었고, 또 그곳에 영주하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일본까지 토벌하여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내용에서 활동한 비중이야 어떻든 백결선생(百結先生) · 우륵(于勒) · 장보고(張保皐) 등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아 민족의식의 반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선 후기 가장 많은 인기를 모은 소설 중의 하나로서, 구성이 치밀하고 규모가 방대하며 표현이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여성 인물의 성격도 매우 개성적으로 창조되어 있어 고전소설 가운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제사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서유영

조선후기 사릉참봉, 의령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호는 운고(). 달성위() 서경주()의 6대손으로서, 아버지 서격수()와 어머니 안씨()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 서옥수()의 양자로 들어갔다.

 

1830∼1860년은 문학 활동기로서, 서유영은 남사()·강사()·죽사()·난사()·낙사()·낙산시사() 등의 시모임을 결성해 경기도 양주와 한성지역의 유수한 문인들과 문학적 교유를 확대해 가며, 다양한 양식을 수용하여 문학세계를 심화시켜 간다.

 

1860∼1868년은 벼슬을 하던 기간으로서, 1860년(철종 11)에 조상의 덕으로 사릉참봉()을 제수받고, 1865년(고종 2) 가을에 경상도 의령현감()에 부임한다.

그러나 4년만에 파직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 이 시기에도 꾸준히 문학적 교유와 창작활동을 지속하는데, 특히 1863년(철종 14) 12월에 소설 「육미당기()」를 창작한다. 의령현감에 부임하고서는 청백한 자세로서 수령의 직무를 다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암행어사에게 무고()를 입어 유배된다.

 

1868년(고종 5) 이후는 유배 및 은둔기로서, 1868년(고종 5) 가을 평안도 삼등()에 유배되었다가 1870년(고종 7) 1월에 유배가 풀리어 양주로 돌아온다. 고향인 충청도 금계(: 지금의 )로 낙향하여 생활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친다.

 

 






**전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