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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소설 전문 줄거리 해설/2021 수능특강

유득공 유우춘전 줄거리/해설

 

 

 

 

 

 

 

 

 

 

유우춘전 줄거리

서기공()은 음악을 즐기며 손님을 좋아했다. 내가 해금()을 켜자 기공은 내 실력이 비렁뱅이 거문고라고 나무라면서 유우춘과 호궁기()의 거문고를 배우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금대거사()의 안내로 십자교 밑에 있는 초가집으로 유우춘을 찾아가 그의 해금솜씨를 듣고 내가 비렁뱅이 거문고를 면할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우춘은 또 자신의 친구 가운데 호궁기가 거문고에 빼어남을 말하였다.

자신의 거문고 솜씨는 궁기만이 알 뿐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배우려는 나의 거문고 교습을 의심하였다. 우춘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업()도 버리고 내게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효자였다.

 

유우춘의 말에 “기술이 더욱 진보될수록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어찌 해금에서만 그럴 뿐이겠는가? 우춘의 거문고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르는 자 없건마는 그의 이름을 듣고 아는 것이다. 참으로 그 거문고를 듣고 아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음악이 극치에 달할수록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자가 적어짐을 이른 말이다. 내가 유우춘을 만난 뒤인 어느날 나를 찾아온 네 사람의 악객() 가운데에 우춘이 켜는 해금을 들은 감격을 “슬프고 보드랍고 감개한 소리”라고 칭찬하는 이가 있었다.

 

 

 

 

 

 

이해와 감상 및 해설

"유우춘전"은 그 당시 천시하던 기예() 가운데 해금으로 독보하던 유우춘의 일생을 전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서기공의 음악에 대한 조예와 유우춘의 음악을 향한 의욕이 어우러져 있다.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기보다 차라리 고독을 감수하더라도 예술을 심화하여야 한다는 작자 유득공의 근대적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은 유득공 자신의 처지를 유우춘의 애처로운 생애에 비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묘오자득()의 도가적 사상과 함께, 조선후기에 심화된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불일치 경향을 보여 준다.

 

 

 

유득공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영재집()』·『고운당필기()』·『앙엽기()』·『사군지()』·『발해고()』·『이십일도회고시()』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는 유득공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아,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오늘날의 학문 수준으로 보아 높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서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노력한 모습은 『이십일도회고시』에서도 잘 보여준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에는,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調)·반정균()으로부터 재기종횡(: 재주와 기백이 활발함), 재정부유(: 재주가 많음)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유득공-유우춘전"은 조선 후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원문이 한문입니다. 전문을 읽으신다면 그 점을 염두해두시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전문은 없습니다!**